처음으로 좋아한 아이돌이자 제일 오랫동안 좋아한 아이돌이었다. 한 사람과 4년 이상 관계를 지속하는 건 현실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연예인이라면 더 그렇다. 내가 A를 오랜 기간 좋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어려서’ 그리고 ‘처음이라서’가 크지 않았나 싶다. 현실 세계 포함 누군가를 그렇게 조건 없이 열정적으로 좋아해본 건 A가 처음이었다. A의 솔로곡을 들으면서 힘을 내고 매일 A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간단하게나마 하루일과와 응원메시지를 적고 A가 속해있는 그룹의 컴백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 시절 나에겐 A를 좋아하는 일이 행복이었다. A는 인기가 없는 멤버였다. 데뷔초에는 존재감조차 미미했었고 그 이후에도 없어선 안 될 존재까지는 아닌 그런 멤버였다. 하지만 내가 좋아한지 딱 3년째 되던 해부터 점점 주목을 많이 받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인기 1,2위를 다투는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A의 팬유입이 한참 활발했던 시기에 탈덕했다. 탈덕한 이유는 시간이 흘러서, 몸도 마음도 많이 성장해서, 그때만한 감정이 남아있질 않아서...웃기게도 탈덕 후에 A가 했던 몇몇 행동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정이 떨어졌다. A는 본인 기분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기분이 안좋은 날에는 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종종 뚱한 표정을 하고 팬들의 말에 단답으로 일관했었다. 팬들은 별명까지 붙여가며 A의 그런 모습을 시크하다고 포장해줬다. 탈덕 후에 또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A만큼 능력치가 출중한 아이돌은 정말 흔치 않다는 것이다. A가 가진 능력은 오로지 보컬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컬의 기량이 엄청 났었다. 그 그룹에 있는 게 아까울만큼. A의 능력치가 좀 더 떨어졌었다면 탈덕이 더 빨랐을 거라고 확신한다.
B
포지션: 래퍼
얼굴: B+
피지컬: A-
노래: F
춤: B+
랩: F
음색: F
인기: B+
덕질 기간: 8개월
A 이후 다신 돌덕질을 안 할 줄 알았던 나에게 불현듯이 찾아온 아이돌이었다. 그러나 나의 덕질 역사를 통틀어서 왜 좋아했는지 아직까지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새끼이기도 하다. B는 노래를 못한다.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음치 수준으로 못한다. 음색도 최악이다. 팬깍지 끼고도 도저히 못들어 줄 만큼. 절대 노래를 해선 안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B였다. B는 그런 아이돌이었다. 얼굴로 캐스팅 됐지만 노래를 못해서 랩을 담당하게 된,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아이돌. 뭐 아무렴, 상관 없었다. 아이돌로서 제일 중요한 덕목은 ‘무대’라고 생각했으니까. 무대를 잘한다는 건 노래랑 랩 실력보다는 춤, 표정, 제스쳐가 더 결정적이었다. 다행히도 B의 춤은 봐줄만 했다. 문제는 겨우 그거 하나—제일 잘추는 것도 아니고—봐줄만 하게 추는 주제에 노오오오력 하려는 의지가 일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리걸음만 해도 다행이지. B는 이 이상 마이너스도 없을 것 같은 실력에서조차 한 걸음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무대를 성의 없게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나는 B의 이런 모습을 싫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를 좋아했던 이유는 ‘순수함’이었다. B는 유독 또래에 비해 어리숙했다. 인터뷰를 해도 다른 멤버들과는 다르게 화술 교육을 받은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었다. 내게는 이런 모습이 딱 그 나잇대의―얼굴 빼고―평범한 남자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싫어했던 B의 모습 역시 순수함에서 비롯되었다. B는 순수해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뇌까지 순수했던 나머지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할 일이고 자시고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B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B는 단지 운빨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 난 놈이었다. B를 탈덕한 후에 깨달은 사실 하나는 있다. 멍청한 놈은 절대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
C
포지션: 댄서, 래퍼
얼굴: A+
피지컬: C-
노래: C
춤: B+
랩: E
음색: D
인기: B
덕질 기간: 1년
C에게는 병크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매우 엄청난. 그래서 입덕장벽이 컸다. 나 역시 처음에는 C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온갖 시선과 편견을 뒤로한 채 C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는 오로지 얼굴 하나였다. C는 내가 선호하는 타입의 미남상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사람이 이 정도로 잘생기면 타인의 취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C를 보고 알았다. 심각한 얼빠였던 나는 처음 몇 달 동안은 C의 얼굴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던 콩깍지도 공백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벗겨지기 시작했다. C의 경우엔 특이하게도 C라는 인간 자체보다도 C의 팬덤이 시발점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C의 그룹내 인기는 병크 때문에 높지 않았다. 그러나 팬덤 충성도는 따라잡을 멤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C의 팬덤은 어딘가 기형적인 구석이 있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객관성을 잃지 않는 편이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나랑 친한 사이여도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C의 팬덤은 어딘가 거북했었다. C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 문제는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낮춘다는 점이다. 이해는 한다. 병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좋아해준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고맙겠지. 그러나 C가 그런식으로 자신을 낮출 때마다 팬들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는 C를 필사적으로 보호해줘야 해!' 같은 특유의 사명감을 점점 강화시켜갔다.C의 팬덤에 학을 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에 있었다. C가 직접 작사에 참여해서 기대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음원이 공개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앨범을 재생했다. 그런데...랩을 못하는 건 둘째치고 수록곡 중 한 곡의 가사가 아이돌로서는―특히나 병크 있는 멤버치고는―적합하지 않은 가사였다.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 반 탄식 반으로 팬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바랄 걸 바랐어야했다. C의 팬들은 되려 C의 작사능력과 랩 실력을 진지하게 진심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그대로 트위터를 껐다. 공교롭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C는 점점 역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한 건 오직 그의 얼굴 뿐이었는데, 얼굴이 역변하니 다른 모든 것들이 하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이답지 않은 유아적인 행동과 작위적인 말투도, 실력파인 척 하지만 B랑 도찐개찐인 랩 실력도, 성난 수탉이 날개짓을 하듯이 파닥파닥 거리는 춤사위도 전부 다. 무엇보다도 C의 병크에 가장 환멸을 느꼈다. 나는 그대로 뒤도 안돌아보고 탈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C의 팬덤이 유독 기형적이었던 게 아니라 내가 C를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팬들보다 부족해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지금으로썬 C가 역변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미련없이 탈덕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교훈은 있었다. 구설수 있는 놈은 애초에 좋아하는 게 아니다.
D
포지션: 서브보컬
얼굴: A+
피지컬: B
노래: B
춤: B
랩: C
음색: B
인기: A+
덕질 기간: 1년 8개월
C에게서 도망치듯이 좋아했던 아이돌이다. 도피차 치고는 꽤 오래, 많이 좋아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가 C에게 마음이 식기 시작한 계기는 C의 팬덤이었다. 그런데 D의 팬덤 역시 석연치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일반적인 아이돌 팬덤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띄었다. D는 C와는 정반대로 그룹 내 인기는 1위였지만 팬덤 충성도는 거의 최하위였다. 물론 어느 그룹이든 인기 멤버는 스치듯 좋아하는 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보통은 팬덤 중심에 코어팬층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게 일반적이다. D의 경우엔 정확히 반대였다. 라이트팬들이 중심이고 코어팬들은 조용히 활동했다. 그렇다보니 마음 편하게 D를 덕질할 곳이, 같은 포인트에 공감해줄 팬이 없었다. 그 정도에서 그치기만 했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D는 겉으로 보이는 인기가 많다보니 자연스레 타멤버 악개의 표적이 되기 쉽상이었다. 악개 몇몇이 작정하고 D를 털면 라이트 기반인 D의 팬덤 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D를 탈덕하고 타멤버 악개들에게 동조하는 팬들도 많았다.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팬심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코어력이 더 강화됐으면 강화됐지, 내게는 마음이 식을 이유가 없었다. B처럼 멍청하지도 않았고 C처럼 구설수도 없었다. D는 똑똑하고 노력파였고 성격도 유순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D의 외모가 미치도록 나의 취향이었다. 탈덕한 지금도 여전히 외모만은 D가 이상형일 정도로 완벽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마음이 식었다. 나는 엔터업계에 아는 사람이 꽤 있다. 특히 친한 지인 중엔 아이돌과 같이 일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지인이 담당 프로의 출연진 섭외를 고민하고 있기에 나는 D를 적극 추천했다. D는 그 프로에 섭외되었다. 마침내 녹화 당일이 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인에게 D가 잘하고 있는지, 긴장하진 않았는지, 오늘은 얼마나 잘생겼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나 뜻밖의 회신이 돌아왔다. D 때문에 편집이 전부 꼬였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D가 실수하는 바람에 한 쇼트를 통째로 드러내야해서 매끄러운 편집이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제작진이 공들여 준비한 부분이라 상황은 더욱 곤란했다. 현장 관객을 동원한 녹화였기에 재촬영도 불가능했다. 지인은 문제의 장면을 내게 보내줬다. 영상 속에는 태연하게 일을 그르치는 D와 그 옆에서 당황하는 동료 연예인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지인에게 너무 미안하고 당황스러워서 쩔쩔 매며 답장을 보냈다. 진땀을 잔뜩 빼고 다른 일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잘못은 그 새끼가 했는데 그 새끼도 안 한 사과를 왜 내가 했지?" 그렇게 D의 덕질은 막을 내렸다.
E
포지션: 댄서, 래퍼
얼굴: E
피지컬: E
노래: C
춤: A+
랩: B
음색: C
인기: F
덕질 기간: 현재진행중
나에게 있어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아이돌이다. 최초로 좋아한 중소 아이돌, 최초로 좋아한 못생긴 아이돌, 중견 아이돌, 지방 출신 아이돌…. 외모 허들이 굉장히 높았던 나는 E는 물론이고 E가 속한 그룹조차 관심이 없었다. 아마 '쳐다도 안봤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케이블에서 E가 속한 그룹의 무대를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무대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춤을 잘추는 편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유독 E가 눈에 띄었다. E는 무대에 몰입하고 그 무대를 즐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모니터 너머로 확연히 느껴졌다. 나는 E의 춤과 무대가 좋았다. 무대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프로정신이 좋았다. 무대 위에서와는 180도 다른 무대 아래에서의―긍정적이고 쾌활한―모습이 좋았다.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이 좋았다. 무엇보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 없이 노력하고 발전을 추구하는 모습이 좋았다. 여태껏 좋아했던 아이돌들은 활력소 같은 존재에 그쳤었지만 E는 내게 그 이상의 자극제가 되었다. E는 베짱이 기질을 타고난 내가 열심히 살고 싶게 만든다. 한마디로 E를 좋아하는 일이 건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D처럼 많이 좋아진 후에 배신감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E와 함께 일했던 전적이 있는 지인들에게 E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았다. 다행히도 다들 칭찬일색이었다. 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물론 입덕 초반이고 E의 활동을 전부 지켜본 게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실망할만한 점을 찾는 게 더 힘들 것이다. 실망할 일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식어버리겠지. 다 사라져버릴 감정인 걸 아는데도 너무 좋다. 사실 그래서 좀 무섭다. 이번엔 정말 좋아하는 듯 마는 듯 가볍게 좋아하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랑비에 옷젖 듯이 그렇게 스며들고 말았다. 요즘 나는 '아이돌'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아이돌을 좋아했는데 E를 좋아하고 나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현재로썬 아이돌은 가장 종교적인 예술이자 산업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를 신앙에 따라 옳은 길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릇된 신앙심은 누군가를 병들게 하니까. E가 지금처럼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나는 팬으로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