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일이다.


4.

올해부터 페이스북을 비활성화시켰다. 생일날 지인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람한테서 축하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4년 전에 같이 학원을 다녔던 동생이었다. 내 생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고마웠다. 동생은 다시 잘지내냐고 물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속상하다고 했다. 뼈가 있는 말이다. 마냥 축하를 받는 게 미안했다. 동생의 문자를 받고 한참동안 과연 내가 축하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고민했다.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동생한테 좋은 언니이자 친구였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나는 그 동생과 진심으로 친구가 될 생각이 없었다는 것 같아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5.

몇 달 동안 용서하자고 다짐했던 사람이 있는데 마음처럼 쉽게 되질 않는다. 그 사람은 나와 다시 잘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도 그걸 알기에 용서하고 싶은데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피가 식는다.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체할 것 같다. 오늘도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물론 답은 하지 않았다. 문자만 봐도 울분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내 마음도 결코 편치만은 않은데, 나를 위해서도 용서하는 게 좋은데 그게 정말 힘들다. 나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지도 모르는데.


6.

나는 양가 조부모님과 각별한 기억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아마 5~6살 때 쯤, 친할아버지께서 나를 굉장히 예뻐하셨던 기억은 난다. 그게 전부다. 할아버지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돌아가셨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었을 거다. 그런 내게도 처음으로 조부모님과의 유대를 느낄만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이다. 1년 전 오늘 나는 홍콩에 있었다. 생일을 맞아서 홀로 여행을 갔었다. 처음 공항에 발을 내딛던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홍콩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셨던 할아버지부터, 길을 헤매던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손수 길을 안내해주던 아저씨, 번복해서 물어도 짜증 한 번 안내고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셨던 소호거리의 아줌마까지. 유난히 친절했던 홍콩 사람들 가운데서도 한 할머니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는 호텔 이동차 구룡시티 터미널에서 페리를 타고 노스포인트로 가야했었다. 홍콩의 페리 시스템은 한국처럼 교통카드를 찍고 탑승하도록 되어있다. 단,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 한에서. 구룡 시티는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페리를 탑승하러 갔는데 교통카드를 찍는 곳도, 검표원도 없었다. 나는 페리 입구 앞에 서서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를 페리 안에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께서 나를 불렀다. 할머니는 다짜고짜 나를 페리 안으로 데리고와서는 옆자리에 앉히셨다. 할머니께서는 영어를 못하셨고, 나는 북경어와 광동어를 못했다. 할머니는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나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쓰셨다. 한 3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할머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여기가 아니라 도착해서 돈을 지불한다고 말씀하셨던 거였다. 나는 할머니 덕분에 무사히 노스포인트행 페리에 탑승할 수 있었다. 페리 안에서도 할머니와 나는 옆자리를 나란히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휴대폰으로 한국 예능을 보여주셨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광동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홍콩은 영어와 광동어를 공용어로 쓴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광동어는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파파고 번역기를 이용해 할머니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발 번역이 이상하게 되질 않길 바라며. 다행히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할머니는 웃음으로 화답해주셨다. 할머니는 노스포인트에서 내린 후에도 내가 호텔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해주셨다. 다행히 터미널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곳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터미널에서 나와 걷다가 횡단보도에서 헤어졌다.

그 이후로 할머니와 마주친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의 얼굴과,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던 할머니의 광동어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할머니와의 일 이후, 한국에 돌아온 나는 외국인을 만나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쩌면 내가 길을 알려줬던 사람들도 자국에 돌아가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풀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가겠지.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나는 할머니의 이름도, 연세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생일날 타국에서 만난 선물 같은 분이라는 것밖에는.

오늘처럼 나와 내 주변사람들에 대해서 만감이 교차하는 날에는 할머니가 유독 생각난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사람 때문에 많이 무너졌고 그래서 사람한테 무뎌졌다. 이제는 타인에 대해서 믿음보단 불신이 앞선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나에게 주셨던 걸 생각한다. 어떻게 처음보는 사람에게 한치의 거리낌 없이 선의를 베풀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 역시 내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를 지금까지 그리워하면서 정작 우리 조부모님에게 살가웠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편이 편했으니까. 가깝게 지내면 떠안게 될 부담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스스로 멀어지려 했던 거다. 사람 때문에 무뎌진 게 아니라 무뎌지는 편이 편해서 나 스스로 택했던 거다. 내가 축하받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고민에 빠졌던 것도 나부터가 누군갈 축하하는 일을 꺼려했기 때문이고, 내가 그 사람을 용서못하는 이유도 관계가 회복되면 갖게될 복합적인 비용 때문이겠지. 그래, 인정하자.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