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고등학교 때 나는 반에서 나름 영잘알로 통하는 애였다. 기껏해봐야 개봉작이나 한물간 영화나 겨우 보는 친구들 사이에서 할리우드 영화부터 한국영화, 독립영화, 유럽영화를 전부 섭렵한 나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서 제법 영화 좀 봤다고 으스댈 수 있을 정도는 됐는데...근데 뭔가가 부족했다. 이제는 "나 이런 영화도 봤어."라고 자랑할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보기 시작한 게 고전영화였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그 시절 봤던 고전 영화들은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싹 다 재미없었다. 물론 남들 앞에선 절대 티내지 않았다. 그때쯤의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나의 자아를 쫓는 데에 열중했다. 그때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가 재미 없는 이유를 다른 데서 찾으려고 했다. 내가 식견이 부족한 탓에 재미가 없는 거라고 여겼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그게 영화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영화사와 기술적 이해도,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에서 다시 고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고등학생 때보다는 볼만 했다. 근데 그게 끝이었다. 남들이 찬사를 보내는 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여전히 내가 많이 부족한 탓에 보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거의 한 세기 전에 개봉한 영화를 보고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영화적 재미를 100% 경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인류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을 보면 제목처럼 열차가 도착하는 게 전부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플롯조차 없고 심지어 런닝타임(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은 1분도 채 안된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걸 보고 매우 즐거워서 박수까지 쳤다고 한다. 4DX가 상용화된 시점에서 <열차의 도착>을 보고 당시 사람들처럼 박수 치면서 관람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겪고 난 후엔 영화는 재미있는 게 최고다 라는 주의로 바뀌었다. (고전 영화들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고전 영화들을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것과 재미있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그래서 고전 영화를 이끌었던 감독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버스터 키튼과 빌리 와일더를 가장 높게 평가한다. 그들의 영화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여전히 재미있다. "옛날 영화치고 재미있네"가 아니라 현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최다 혹은 최초 같은 기록에 집착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개봉 당시의 영화적 재미가 그대로 유지될만한 영화를 만드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다. 근데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대신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이 그런 감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현역 감독들 중엔 아마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Pulp Fiction>이 개봉한지 20년도 더 넘었는데 아직도 이것만한 신선함과 충격, 재미, 완성도를 모두 갖춘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