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암(2018) 그리고 A Quiet Place(2018)

현재 극장가에는 두 편의 공포영화가 상영 중이다. 바로 <곤지암>과 <콰이어트 플레이스>. 전자는 공포 영화로써 이례적인 흥행에 성공했고 후자는 개봉 전부터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 필자는 같은 날 그 두 편을 연속으로 관람했다. 재미있는 건 이 두 영화들이 지향하는 점이 확연히 대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두 편의 공포 영화를 비교하려고 한다.


우선 표현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곤지암>은 명성과는 달리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장면은 의외로 몇 번 나오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이 예상한 지점에서 한 템포 늦추는 방식으로 전개하면서 순간적인 공포보다는 긴 시간 동안 압박해오는 공포를 선사한다. 반면에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설정이 설정인 만큼 사운드(침묵)에서 오는 서스펜스를 극대화 시킨다. 사운드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청각장애인인 딸의 시점으로 전환될 때 두드러진다.


표현만큼이나 주제면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곤지암>은 노골적인 정치적 코드가 등장한다. 극중 곤지암 정신병원의 개원일과 폐원일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던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환자들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병원장은 박근혜를 연상시킨다. 결정적으로 곤지암 정신병원의 최대 화두인 402호는 사방이 물로 막혀있으며 문이 없는 공간이다. 402호에는 소문의 여고생 귀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명백히 세월호에 대한 메타포다. 결국 <곤지암>은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심연을 곤지암 정신병원을 통해 표현한 셈이다.


<곤지암>이 시대적 공포를 주된 정서로 삼는다면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미국 특유의 가부장주의가 결정적인 정서로 작용한다. 수많은 미국영화들이 그래왔듯이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도 한 가족이 등장한다. 가족들에겐 각각의 역할이 있다. 엄마는 양육을 담당하고 아빠는 괴물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어린 차남은 훗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빠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생존 방법을 배우고, 엄마가 위기에 처한 순간 엄마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반면에 장녀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아빠에 의해 제지당한다. 이들 가족은 가부장주의의 표본이다. 괴물의 등장은 가족-괴물 간의 갈등 이외에도, 아버지-딸 사이의 내부적 갈등을 촉발한다. 다시 말해 가부장주의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가족들의 사투는 가부장주의의 회복을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결말부에 가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가장의 희생으로 딸은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빠가 남겨준 유산 덕분에 침묵의 시대도 곧 막을 내릴 거라는 결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지암>과 <콰이어트 플레이스> 두 편 모두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영화다. <곤지암>은 <블레어 위치>와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에서 선보인 바 있는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따라가고 있으며, <콰이어트 플레이스>에 등장하는 괴물은 <쥬라기 월드> 속 공룡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장르 영화는 결국 ‘클리셰’다. 장르 영화의 성공은 클리셰를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지에 달렸다. 그 부분에 있어서 두 영화는 모두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만약 장르 영화에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보러 가길 원한다면 어느 쪽을 택해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작 나는 장르 영화를 안 좋아해서 그저 그랬다.) 다만 체험적 공포를 원한다면 <곤지암>을 정서적 서스펜스를 원한다면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추천하는 바이다.


<곤지암> ★★★

<콰이어트 플레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