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Bird(2018)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데미안>과 <레이디버드>는 ‘성장’이라는 점에서 궤도를 같이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가정과 학교로 대변되는 안락한 세계에 안주하다가 바깥이라는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나 그 두 세계는 <레이디버드>에서 정확히 반대로 표현된다. <레이디버드>에서 가정과 학교가 속한 새크라맨토는 주인공 레이디버드의 꿈을 가로막고 있는 곳,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곳이며, 바깥(뉴욕)은 그녀의 이상이 실현되는 곳이다.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현실 속 초라한 내가 자꾸만 충돌하기 때문에 현실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레이디버드는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녀에게 있어서 크리스틴은 지루한 가톨릭 학교와 철도 건너편에 위치한 오래된 그녀의 집으로 대변되는 구질구질한 새크라맨토에서의 삶 그 자체다. 반면에 레이디버드는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그녀의 이상향이다.


 그러나 이름 하나 바뀐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다. 그녀의 마음속엔 이미 레이디버드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 그녀는 레이디버드에 가까워지기 위해 기존의 궤도를 탈피한다. 유복한 집안의 자제였던 제나의 눈에 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이가 좋았던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방법으로. 마침내 그녀는 제나의 지인인 카일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절친이었던 줄리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카일과의 연애는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나에게 거짓말까지 들키게 되고, 엄마와의 관계는 자꾸만 어긋난다.


 쥐구멍 같았던 그녀의 인생에도 마침내 볕들 날은 찾아온다. 뉴욕 소재의 대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덕분에 뉴욕행을 반대했던 엄마와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래도 그녀는 뉴욕행을 강행한다. 진짜 ‘레이디버드’가 될 기회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그토록 원했던 뉴욕에서의 삶은 생각처럼 근사하지 않고 그녀 역시 그대로다. 그녀는 지긋지긋했던 새크라멘토에서의 삶이 어쩐지 그리워진다. 그곳의 풍경과 거리,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를 긍정한다. 내가 부정하고 미워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내 이름은 ‘크리스틴’이라고. 그 순간 그녀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전인권 <걱정말아요 그대>

 사람은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내가 나를 부정한다면 누가 나를 기억해주고 인정해줄까?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틴이 새크라맨토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순간은 중요하다. 비록 그 삶이 화려하진 않았더라도, 조금은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게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


 지금 크리스틴에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알을 깨고 나온 새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듯이 그녀에겐 앞으로 내딛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게다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지나온 길처럼 전혀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온 길에 감사하며 새로운 길에 한 발짝씩 내딛는 것, 내가 걸어온 그 길 끝에 도달할 곳은 결국 ‘나’라는 것, <레이디버드>는 이렇게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우리네 삶을 스크린으로 옮겨와 영화라는 특별한 어떤 것으로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