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영화평론가로서 고백하는 편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수줍은 얼굴로, 여전히 비밀을 갖고 있고 싶으면서도, 영화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편지이다. 그러나 고백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언제나 이런 고백이 자기도 모르게 스노비즘으로 빠지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그래서 이 고백은 혹시나 같은 시행착오에 빠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격려이며, 서둘러 고백하여, 만일 피할수만 있다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기대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영화평론가란 그 자체로 취미이어야지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평은 일종의 게임이다. 그건 영화에 관해서 제안하는 하나의 사고이다. 여러가지의 사고와 여러가지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방법으로 텍스트의 그 복잡하고 다양하며 다층적인 세계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여기서 옳은 평론과 틀린 평론이란 가름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아주 개인적인 자리에서 두 명의 영화감독으로부터 아주 부끄러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 사람은 임권택감독이고 또 한 사람은 배용균감독이다. 서로 전혀 다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대화였지만 우연히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왜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평론을 하는 겁니까?"
그것이 핵심이다.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 하나는 영화를 두 번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두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영화에 관한 평론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영화 평론가는 '실패한 영화광'
말하자면 영화평론가란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서, 순진한 영화광과 진정한 영화광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이다. 또는 '실패한' 영화광이다.
물론 근사한 미사여구로 스스로를 평할 수도 있다. 세계관의 문제와, 해석의 사회적 의미,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영화에 대한 비판적 해체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이미 고다르는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불가능하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영화 그 자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이한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수록 고다르가 왜 평론가를 그만두고 (영화 평론지「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그가 시도한 영화비평은 이미 그의 나이 25살에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자기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영화는 고다르에게서 사회의 카메러 옵스큐라인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하나의 상품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생산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끝이 없는 시작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하나의 해석을 시도한 것은, 뒤이어 일어나는 또 다른 해석과의 사이에서, 영화평론가를 준비론적 패배주의의 운명에로 이르는 것에다름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운명인가.
물론 이런 것과 싸운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페미니즘을 말하고, 정신분석학을 언급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실증주의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그저 책 몇권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집단의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이다. 그건 정말 세치 혀를 놀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건 아주 심각한 방법으로, 도덕적인 형태로, 적극적인 모습으로 사회 속에 들어가 실천하는 것이다. 나쁜 영화평론은 사회에 거의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게다가 영화평론이란 항상 나쁜 것이지만!), 한 편의 나쁜 영화는 정말 위험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좋은(!)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좋다는 것이 좀 아슬아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위험한 영화와 그것에 대항하는 영화를 나누고,분리하고, 비판하면서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공격하고, 그래서 영화를 사고한다는 문제를 거듭 제안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번히 그 노력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고다르의 충고였다. 영화에 관한 이론을 영화가 아니 다른 것 (나의 경우에는 대부분 글쓰기에 의존하여)으로 시도할 때마다 거꾸로 글쓰기의 논리가 영화읽기와 노력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다.
그럴 때마다 문학평론에 대해서 '늦는' 질투와 부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문학평론은 문학에 대해서 아무런 모순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글을 쓸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게임한다. 말하자면 그건 철자와 의미 사이의 맘을 통해 서로 접합되고, 뒤얽히고, 그 속에서 다른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런 방법으로 사로 잡히지 않는다. 이미지는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철자는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미지가 자기 멋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철자는 정지하고 거기서 일종의 원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영화는 정말 설명을 원치 않는다
영화감독은 정확히 이해시키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글로 옮길때마다 다른 것으로 만드는영화를 만나는 순간은 영화평론을 자조하게 만든다. 무르나우의 카메라 이동, 드레이어의 구도, 브레송의 응시, 타르코프스키의 프레임, 고다르의 점프 컷, 오가와 신스께의 기록, 자끄 따띠의 소리, 오즈의 공간, 막스 오필스의 크레인 쇼트, 에이젠쉬테인의 쇼트와 쇼트 사이의 거리, 키에슬롭스키의 우연, 파졸리니의 롱 쇼트, 부뉴엘의 농담, 호크스의 투 쇼트, 니콜라스 레이의 시네마스코프, 파스빈더의 시선은 나를 쩔쩔 매게 만든다.
그건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며, 영화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에서 그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자꾸 영화를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드려는 프로젝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거기에 그렇게 있는데, 영화를 소비하는 방법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아주 진지한, 철학적이면서 사회적인 논쟁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치사하게도 자신의 이익을 노린 시비걸기도 있다.
전자는 옳고 후자는 틀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자는 영화를 빌려 자기를 가장하고 하는 논쟁이기 때문에 틀렸고, 후자는 권력과 이익을 노리고 영화 내부의 토대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런 것은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기 조차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노력이 영화를 신화화 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지상위로 날아가지 못한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 속에서, 현실을 통해서, 현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현실은 영화를 만들고, 영화는 현실을 본다.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아주 애매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영화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현실도 아니다. 말 그래도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앙하는 것이다. 때로는 영화 깊숙이 들어가있는 것 같기고 하고, 때로는 현실 이편으로 돌아와 영화를 허깨비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변덕장이? 변덕장이라기보다는 이건 일종의 숙명같은 것이다. 영화 평론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아무런 자리도 없다. 오히려 영화에 의해서 위치를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추락하고, 때로는 좌로 이동하기로 한다. 만일 그걸 고정하려고 한다면, 이제 그때부터 텍스트의 목수라고 부르는, 텍스트로부터의 소외현상이 벌어진다. 어떤 방법으로도 타란티노와 타르코프스키와, 스필버그와 키아로스타미와, 자끄 리베뜨와, 임권택과, 팀 버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파시스트적인 통합'은 불가능하다. 오직 검열에서만이(!) 그런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영화평은 검열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을 갖고 검열위원이 된다는 일은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검열은 범죄이며, 사라져야 할 국가제도이며, 영화에 대한 가장 끔찍한 능욕이다) 검열이기는 커녕 영화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거꾸로 풀어놓는 일이어야만 한다.
"영화는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 아니겠어?"
물론 처음 영화평을 쓰던 순간의 황홀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교지에 써 놓은 영화평을 읽으며, 인쇄된 최초의 나의 글을 보며, 마치 남의 글이라도 읽는 것처럼 신기해하던 순간을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대학 학보에 영화평을 쓰며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으며, 친구의 표현을 빌리면 '닥치는 대로 산산분해'시키는, 악랄한 새디즘을 즐겼던 그 악동 시절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못 길을 들어선 것이다. 다른 영화평을 쓰기 위해 한 시절에는 온갖 책을 뒤지기도 했다. 여름방학 시절 도서실에서 '가'부터 시작해서 도서카드를 놓고 하루에 열권 이상을 정리해 나가기도 했다. 또 모든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리지 않고 '안 본 영화'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왜 나는 영화감독이 되어야 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정말 영화를 좋아하기는 한 것인가? 나는 혹시 영화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먼 길을 돌아 다시 하고 싶다는 자리로 이끌려 왔다.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를 이끄는 것은 70년대의 고다르이다. 비디오를 통해서, 새로운 영상을 통해서, 영화의 바로 곁에서, 영화를 사고하는 것이다.
오랜 선배인 김홍준 감독은 '결국' 영화를 하면서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영화는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 아니겠어?"
하지만 고작해야 영화평이나 쓰는 나로서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많은 친구들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고백컨대 영화평을 쓰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직전에 멈춰 선것이다. 영화를 꿈꾸는 '미지'의 나의 친구들이여, 망설이지 마실 것. 영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이미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영화는 정말 설명을 원치 않는다. 거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증언 부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영화에 대해서 거듭 이야기하려 든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영화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영화를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다. 이제는 영화를 '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에로 이끌린다. 그래서 나는 틀렸다.나 진정 꿈꾸는 것이 무엇인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출처: VIDEO MOVIE, 1995
어느 낯선 영화광으로부터 보내온 편지, 또는 영화를 다시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