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NOBYL(2019)


What is the cost of lies? 


<체르노빌>은 한 남자의 대사로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일종의 선언문 같기도 하고 자기고백 같기도 한 말들을 나열하다가 끝내 자살을 택한다. 드라마는 이내 곧 우크라이나 북부의 어느 작은 마을로 우리를 이끈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비상시 발전소의 작동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안정성 테스를 시행중이던 야간근무자들은 급격히 올라가는 출력에 당황한다.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제동 시스템을 가동시키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전 1시 24분, 압력을 견디지 못한 반응로가 마침내 폭발한다. 안정성을 위해 시행되었던 검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로 이어진다.


<체르노빌>은 사고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사고 조사회 위원장이었던 레가소프는 재판을 통해 사건의 경위를 밝힌다. 실상은 이러했다. 근무자 중 한 명이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검사를 중단하려 했지만, 상관의 강압적인 지시에 의해 실험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군사용 플로토늄을 개조해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방식으로 설립되었으며, 정부가 그 사실을 은폐했다는 정황을 폭로하면서 ‘진짜’ 사건의 경위가 드러난다. 레가소프는 목숨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공표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의 증언은 기록되지 않았고 도리어 과학자로서의 모든 지위와 영예를 박탈당한다. 급기야 그는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을 택하기에 이른다. 체르노빌 참사를 낳았던 관료주의가 명망 높았던 어느 과학자의 일생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관료제는 많은 양의 업무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위계적인 시스템이 자칫 관료층을 권위주의적으로 변모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소련의 엄격한 관료주의 역시 스탈린의 독재 하에 탄생했다. 스탈린은 뒤늦은 공업화에 뛰어든 소련을 미국에 필적하는 최대 공업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소련의 발전을 저해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관료독재로 인해 저하된 노동생산성이 소련의 경제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2차 대전의 여파로 소련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곧 냉전시대가 도래하고 미국과 대립구도에 있던 소련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설립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소련 산업기술의 집약체이자 상징으로 작용하게 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냉전의 끝에서 시대가 남기고 간 참혹한 산물이었다. 우리는 체르노빌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관료주의가 어떻게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비극적인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던) 개인을 정치적 논리에 의해 해석하고 규정하고 무력화 시켰는지 목격했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세월호 참사와 꼭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삶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이 체제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준 비극적인 사고였다. 슬프게도 두 사고는 현재진행중에 있으며 아직까지도 책임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미상관으로 마무리되는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제일 처음에 보았던 남자와 다시 한 번 마주한다. 레가소프 교수 말이다. 그가 질문한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거짓의 대가는 화재를 진압하려다 피부가 녹아내린 소방관이고, 25살의 나이에 고통스럽게 세상을 마감한 청년이고, 출산 후 4시간 만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고, 영문도 모른 채 총살당해야 했던 생명들이고, 진실을 묵살당한 현실 앞에서 끝끝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과학자다. 그리고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다. 거짓의 대가란 그런 것이다.


“Every lie we tell incurs a debt to the truth. Sooner or later that debt is pa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