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ian Barnes,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소설은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1부)과 불충분한 문서(2부)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자기기만 혹은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제외하고 이 작품을 논하긴 힘들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망각이 뒤따른다. 영화 한 편을 본다고 치자.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한들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대사, 미장센, 카메라 숏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우리는 인상 깊었던 몇 장면만을 뇌에서 편집해서 기억할 뿐이다. 즉,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무언가를 망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토니 역시 과거에 자신이 베로니카에게 퍼부었던 악담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40년 만에 베로니카와 재회한 토니는 그녀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철없는 몽상에 빠져있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말한다. “전혀 감을 못잡네.”


 그렇다. 제목과는 달리 소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감을 못 잡는 건 토니뿐만이 아니다. 토니의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의 머릿속 역시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지배적이다. 롭슨과 에이드리언이 왜 자살했는지, 사라는 토니에게 어떤 의미로 딸에게 모든 것을 내주지 말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토니에게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엔 무엇이 적혀있는지 끝끝내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이다. 바꿔 말하면 뭔가 일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주관적인 이야기라는 말이 된다. 토니의 이야기가 그 증거다. 토니는 1부에 걸쳐서 자신의 과거를―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판단 혹은―회상하지만 2부에선 그 모든 것들이 토니가 스스로 미화시킨 기억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토니의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일깨워주는 베로니카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토니에게는 직접적인(법적인) 책임이 없다. 토니는 감정에 휩쓸려서 악담을 퍼부었던 것뿐이고, 실제로 행동한 사람은 에이드리언과 사라, 두 사람이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기억도 100% 틀렸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그녀가 토니를 전적으로 원망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토니가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건 사실이니까. 토니도 베로니카도 100% 틀린 게 아니라면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할까. 사실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토니가 처음으로 사실과 마주한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회한이다. 그리고 회한 뒤에 찾아온 건 더 큰 혼란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할 때 오히려 명확한 삶의 자세를 유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억이 아닌 망각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감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낸다. 그러나 기억을 신뢰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인간은 기억을 윤색하지 않고는 존속하기 힘든 존재라는 거다. 이 사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다. <올드보이>에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대수가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기억을 지우는 데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오대수가 스스로 망각하기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오대수와는 달리 토니는 그저 그 순간 느끼는 깊은 회한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을 알게 되어도 상황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서 오는 회한과 무력감을. 사실 이 작품의 주된 정서는 망각보다는 회한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끝끝내 회한하기를 거부하고 망각에 쟁점을 두었던 건 나라는 사람이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통해 기억을 측량하지만, 시간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제한하고 규정한다. 그렇기에 코앞에서 벌어지는 역사는 가장 분명한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다. 인류가 시간을 지배하지 않는 한, 망각하고 자기기만에 빠지는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미화시킨 끝에 회한과 혼란을 느꼈던 토니처럼. 토니는 역사를 두 번 규정한다. 젊었을 땐 ‘승자들의 거짓말’로, 노인이 되어서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살아남은 이들의 회고록’으로. 나는 여전히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기억이 가변적인 거라면, 그래서 ‘뭔가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면 ‘history’라는 말은 ‘his story’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