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More, Utopia



1991년, 공산주의는 공식적으로 붕괴했다. 소련이 해체를 선언한 것이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이 있지만 순수한 공산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그렇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체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알고있는 결과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법이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불평등’을 지적했다. 소수의 자본가들이 모든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승자독식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일시적으로 이상적인 사회상으로 부흥했었다. 그리고 이 열기에 힘입어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자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를 목표로 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독재정치 및 전체주의로 변질되었고, 공산당 관료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을 착취했다. 토마스 모어가 지적했던 불평등과 부정부패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와 인권마저 빼앗았다. 내가 토마스 모어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토마스 모어가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의 국민이었다면 반대진영을 옹호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유토피아는 이미 유토피아가 아닌 셈이다. 물론 자유의 박탈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그 자체의 문제점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와 독재정권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언젠가 부패하기 마련이다. 소련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했지만 스탈린주의로 변질되었듯이 중국과 북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조지 오웰은 이러한 공산주의의 한계를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풍자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한계가 명확하다. 가장 큰 한계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믿음,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이론은 이론적으로는 분명 이상적인 사회가 맞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이론대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린 사회를 과연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뻔히 예상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사랑이 뒤따라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 없이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계만큼이나 고전으로서의 가치 또한 명확하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소련 국민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다른 서구권 국가들과 자신들의 삶을 비교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2017년 설문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국민 58%가 소련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답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2017년 기준으로 국적 포기자수가 22만명을 돌파했다. 나는 이 결과들이 <유토피아>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의 진짜 의미는 사실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공산주의가 독재정권으로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것처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만이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체재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알고있는 결과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법이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어렵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는 또 다른 이상향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의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나는 여전히 탈조선을 꿈꾼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앞으로도 영원히 회자될 지 모른다는 예감을 감히 가져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