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한가지 공(共)’자에 ‘느낄 감(感)’자를 써서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쇼코의 미소>의 키워드는 ‘공감’이다. 책에 수록된 7편의 단편 속엔 각기 다른 세대와 국적, 상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적지 않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서로에게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연대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들의 공감에 연대할 수 없었다. 작가는 인물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는데, 캐릭터, 서사, 문체, 대사 등이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단순하게 좋은 사람, 단순하게 나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복잡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고 아이러니는 서사를 풍부하게 만든다. 이 사례가 잘 반영된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성실한 노동자였던 류(신하균)는 누나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역시 성실한 동진(송강호)의 딸을 납치한다. 이 사실을 안 누나는 자살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동진의 딸마저 죽게 된다. 모든 정황을 알게 된 동진은 류에게 말한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쇼코의 미소>에선 그 경계가 분명하고 그들이 행하는 선과 악은 지극히 단순하고 전형적이다. <쇼코의 미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등장하는 김애란의 <서른>에선 그 자체로 선인 혹은 악인이 아닌 복합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감정에 호소하거나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되 꾸밈없이 고백함으로써 종국에는 더 큰 여운을 남긴다. 반면 <쇼코의 미소>는 평면적인 인물을 보완하기 위해 마땅히 공감을 불러일으켜야만 하는 상황과 감정을 자꾸만 주입시킨다. 결국 감정의 과잉은 소설의 주제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쇼코의 미소>가 거짓으로 점철된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 호의적이지 않은 나조차도 몇몇 문장에는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결정적으로 7편의 단편과 작가의 말까지 모두 읽고 나서 작가의 내면에 집중해서 쓴 소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안 보일 뿐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랬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과 <서른>은 있는데 <쇼코의 미소>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 문장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 깊이 공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