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Man Blues(1997)


우디 앨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마도 78년도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된 일화일 것이다. 우디 앨런은 그 당시 <Annie Hall>이란 작품으로 4개의 주요 부문에서 오스카를 석권했었다. 그러나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5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거행되었던 날이 마침 우디 앨런이 재즈 클럽에 방문하는 날과 겹쳤던 것이다. 우디 앨런은 아카데미 대신 평소처럼 재즈 클럽에 참석해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재즈에 대한 우디 앨런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Wild Man Blues>는 우디 앨런과 그의 재즈 클럽 멤버들이 함께 유럽투어를 순방하면서 감독이 아닌 클라리넷 연주자로서의 우디 앨런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우디 앨런만큼이나 그의 지인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특히 우디 앨런의 아내인 순이는 우디 앨런 못지않은 비중을 자랑한다. 알다시피 우디 앨런과 순이의 스캔들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 파장으로 한때 미국에서는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의 이름으로 ‘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세간의 스캔들의 주인공이 지적이고 똑똑한 여성으로 대표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Wild Man Blues>를 보고 납득할 수 있었다. 순이에게선 얼핏 <Manhattan> 속 트레이시라는 캐릭터가 연상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순이는 우디 앨런의 작품 중 <Manhattan>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았다.) 그러나 차츰 지켜보면서 지성과 유머감각, 여유로움을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이아 키튼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우디 앨런과 함께 있을 때 그런 면모가 더 잘 드러났는데 우디와 순이의 대화 장면은 마치 우디 앨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다이아 키튼과 우디 앨런이 그랬듯이) 우디와 순이는 부부나 연인으로서의 케미스트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 같은 편안함과 두 사람만의 유대가 느껴졌다. 한마디로 순이는 우디 앨런의 작품들 속에서 익히 봐왔던 우디 앨런의 뮤즈, 그 자체였다. 


순이 뿐만 아니라 우디 앨런 역시 그간 그의 작품들 속에서 본인이 연기했던 혹은 그의 페르소나로 등장했던 캐릭터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예를 들면 개에 관해서 질색하는 모습이라던가, 순이와 이태리 거리를 구경하고 있는데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대는 남자를 혼쭐내주겠다고 허세를 부린 뒤 순이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남자를 조용히 말로 타이른다던가, 생각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반어법으로 돌려 깐다던가 하는 모습 말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속 캐릭터가 할 만한 행동과 대사를 그대로 하고 있어서 100% 다큐멘터리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다만 딱 한 가지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뉴욕’이 아닌 ‘유럽’이라는 점이다. 우디 앨런은 유럽에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찍었고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감독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뉴욕을 대표하는 감독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YES다. 단순히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많이 제작해서가 아니다. 우디 앨런은 본인 작품에 자의식이 많이 반영되는 걸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가 나고 자라고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 뉴욕이란 도시는 우디 앨런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유럽과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보면 이 점이 확연히 대비되는데 대표적으로 <Midnight In Paris>와 <Cafe Society>를 예로 들 수 있다. <Midnight In Paris>는 약 3분 정도 소요되는 오프닝 시퀀스를 인물들 없이 파리의 전경을 보여주는 데만 사용한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장면이다. 반면에 <Cafe Society>는 뉴욕에 살던 주인공이 화려한 성공을 꿈꾸며 할리우드로 떠나지만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정착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작품은 뉴욕을 향한 우디 앨런의 향수와 정서의 메타포인 셈이다. (시작부터 직설적으로 뉴욕에 대해서 찬양하는 영화도 있다. 아마도 <Annie Hall> 아니면 <Manhattan>이었던 것 같다.) <Wild Man Blues>에서도 우디 앨런은 특유의 궁시렁 거리는 말투로 뉴욕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유럽의 도시들을 찬양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이, 머물러야 할 곳이 뉴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Wild Man Blues>는 내게 감독으로서의 우디 앨런의 면모와 신뢰를 재차 확인시켜주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그에 대한 불신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우디 앨런은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훌륭한 작품이란 가식 없는 솔직한 자기고백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에게서 인격적인 결함을 발견하면 그의 작품을 어떻게 향유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우디 앨런은 이 문제에 있어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보면 제목처럼 속죄를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속죄란 기독교적 속죄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속죄다. <Wild Man Blues>를 보고선 문득 <속죄>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디 앨런의 영화는 본인을 위한 속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