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 시대의 영화: 배심원들(2018)과 악인전(2019)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겁니다. 기준도 없이 아무나 함부로 처벌하면 되겠어요?" 

  한 남자가 재판장 앞에 서있다. 그의 죄목은 존속살해죄. 방청객과 배심원, 심지어 법조인들까지 모두가 천인공노하며 유죄를 주장하는 가운데 오직 8번 배심원만이 의문을 제기한다. “손가락이 없는데 망치를 잡을 수 있나요?” 외로운 싸움처럼 보였던 재판은 점차 8번 배심원의 주장 쪽으로 여론이 기울기 시작한다. <배심원들>은 살인사건을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격렬한 토론을 통해 의견을 합의해나가는 과정을 다룬 고전명작 <12 Angry Men>을 노골적으로 오마주 하고 있다. <12 Angry Men>은 사건보다 사건의 진실을 가려내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면 <배심원들>은 사건자체로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극빈층이었던 피고인은 기초수급생활자 신청을 위해 노모와 함께 주민센터로 향한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가족포기각서. 노모의 부양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기초수급생활자로 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원의 설명에 울컥한 피고인은 폭력을 행사한다. 직원은 말한다. “법이 그런 걸 어떡해요?” 바로 여기서 법치주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법치주의는 중세시대 시민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절대왕정 시절, 왕의 변덕스러운 통치로 인해 정국혼란을 맞았던 영국은 왕권을 제한시키기에 이른다. 아무리 왕일지라도 무조건 법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것이 법치주의 시작이다.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를 향상시킨 법치주의의 탄생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진일보적인 사건이었다. 법치주의는 피지배자와 지배자가 모두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그러나 법 자체의 공정성과 형평성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배심원들> 속 피고인 같은 극빈층들을 위해 존재하는 법안이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해 비극적인 참사로 이어졌듯이 말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김준겸재판장(문소리)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법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과연 법이 정말로 사람을 보호해주고 있을까? 



“나쁜놈이 더 나쁜놈을 잡는다?”

“아니, 나쁜놈 둘이 더 나쁜놈을 잡는 거지.”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조금 다르지만 <악인전> 역시 <배심원들>과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다.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분노케 했던 오원춘 사건과, 얼마 전에 일어난 진주 아파트 방화 살인 사건은 모두 경찰의 업무태반이 초래한 사건이었다. 영화에선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이 경찰의 늑장대응으로 무고한 피해자가 연이어 발생한다. 공권력의 한계를 느낀 형사 정태석(김무열)은 유일한 생존 피해자인 조직폭력배 두목 장동수(마동석)와 손을 잡는다. 장동수는 자신의 손으로 범인을 죽이려 하고 정태석은 끝까지 법에 의해 처벌받기를 촉구한다. 결국 정태석의 바람대로 범인은 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범인은 사법체계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진술을 번복해서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이를 이용하기까지 한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김준겸 재판장(문소리)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다는 말은 법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법은 정녕 사람을 보호해주고 있는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배심원들> 속 피고인은 약자이기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된다. 심지어 재판에서조차 약자라서 징역형에 놓일 위기에 처한다. 반면에 <악인전>에서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 오히려 연쇄살인범을 보호하는 데 이용당한다. 현실도 영화와 다르지 않다. 판결문을 보면 생계형 범죄는 칼같이 형량을 부여하면서 유독 강력범죄는 ‘심신미약’을 근거로 약소한 형량을 부여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가해자가 권력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법을 집행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형평성과 공정성, 독립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런 불신은 사회를 병들게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미 너무 많이 병들었는지도 모른다. 온갖 불법비리의 온상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버닝썬게이트는 단 한 명도 처벌받지 못한 채 수사가 종결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은 현재 분노를 넘어서 무력감과 허탈감마저 느끼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와 명예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악인전>은 이처럼 공권력으로 악인을 다스릴 수 없는 현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범인은 결국 사형 아닌 사형선고를 받고 살아난다. 감옥에 입소해 징역을 살던 범인의 앞에 어느 날 누군가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장동수. 영화는 범인의 앞날에 지옥 같은 감옥생활이 펼쳐질 것을 예견하며 막을 내린다. 나름 통쾌한 결말이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남는다. 개인에 의해 실현된 정의는 결코 정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배심원들>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관성처럼 유죄판결을 내리려했던 김준겸 재판장이 퇴색된 법치주의의 이념과 사법부의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투명한 절차와 공정한 결과로 국가기관의 권력을 통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할 사법부의 사명을 말이다. 결국 피고인은 누명을 벗고 사랑하는 딸과 재회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법은 정녕 사람을 보호해줄까, 란 질문을 던져보자. 여전히 확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공정성과 형평성, 독립성이 보장되는 ‘좋은 재판’이야말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영화 <배심원들>과 <악인전>은 말하고 있다.

배심원들

악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