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ity(2013)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 우리는 이것을 ‘중력’이라고 부른다. 중력에는 질량과 비례하고 거리와는 반비례하는 특별한 법칙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도 이 같은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해가 지날수록 세월의 체감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기분을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중력의 끝에 다다르면 땅이 있듯이, 시간의 끝엔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이언이 행하는 모든 몸부림은 죽음을 위한 여정이다. 그리고 죽음을 위한 여정이야말로 삶의 본질과 가깝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현재를 더 가치 있게 만든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상상해보라. 10년 전과 지금, 그리고 10년 후의 의미가 크게 다를까? 하지만 인간은 언젠간 끝이 올 것을 알기에 인생 전반에 걸쳐서 미래를 설계한다.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이언 역시 죽음을 인식하기 전까진 의미 없이 우주를 표류한다. 지구에서의 삶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목적지 없이 종일 드라이브만 했으니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이미 죽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언은 위성의 잔해와 맞닥뜨리면서 무리로부터 잠시 동안 분리된다. 우주가 고요해서 좋다던 그녀는 고독 속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이후 동료의 시신을 발견하고 말 그대로 물리적, 신체적인 죽음을 인식한다. 이제 라이언은 지구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하지만 라이언에게는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여타의 재난영화와는 다르게 <Gravity>는 라이언이 돌아와야만 하는 마땅한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기다리는 남편도 없고 하나 뿐인 딸도 오래 전에 죽고 없다. 삶을 지속하는 쪽보다는 지속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지구에 발붙이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았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 점을 의도한 듯 라이언의 행동근거에 감정 대신 위기를 부여한다. 맷이 끈을 놓았을 때, 에어로크에 화재가 났을 때, 두 번째 잔해가 닥쳤을 때, 소유즈가 낙하산에 걸렸을 때 등, 라이언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은 전부 위기와 직결된다. 그렇다. 생명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죽고 싶지 않다는 충동, 이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충동만이 라이언이 움직이는 이유의 전부다. 그러나 이 역시 ‘왜 돌아가야만 하는가’의 해답은 되지 못한다.


 몇 번의 난관 끝에 연료마저 없단 사실을 안 라이언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순간 맷의 환상이 나타난다. “Do you wanna go back or stay here? If you decide to go, then you gotta just get on with it.” 라이언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도해보기로 한다. 라이언은 다시 한 번 착륙을 시도한다. 그녀의 도전 앞에서 ‘왜 돌아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다만 그녀의 여정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침내 라이언은 지구에 안착한다. 기다리는 사람도 목적지도 없지만 그녀는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무의미해보였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한다. 중력의 끝에, 시간에 끝에 다다르는 삶 자체가 위대한 여정임을 안다. 그녀는 강을 헤엄쳐 나와 육지 위로 두 발을 내딛는다.


 라이언은 다시 태어났다.